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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인물(歷代人物)

역대인물(歷代人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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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鄭崗) 남양부사 을경(乙卿)의 아들 조선 초기에 검교(檢校)ㆍ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ㆍ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내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정견
(鄭堅) 1509~? 자(字)는 옥지(玉至). 현감 문우(文遇)의 아들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정광연(鄭光淵) 1841(헌종 7)~1891(고종 28) 조선 말기의 문신. 민화(民和)의 아들이다. 1882년(고종 19)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 교리ㆍ응교에 임명되었다. 1888년 영흥부사로 재직중 고산의 광부들이 전 부사 이용익(李容翊)과 환전수쇄(還錢收刷)때문에 소요를 일으켜 관아에 돌입하여 찰방을 구타하고 민가를 때려 부순 일이 있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정광연을 파직, 상주로 유배시켰다. 그러나 1890년 부호군으로 고강관(考講官)이 되어 춘도기강(春到記講)을 비교할 때 강생(講生)들이 작폐하므로 파직되었다.


정광운

(鄭廣運) 1707(숙종 33)~1756(영조 32).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덕이(德而), 호는 휴휴자(休休子). 진후(震)의 아들이다. 1730년(영조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1737년 지평이 되었고, 이어 정언을 거쳐 군수가 되었는데, 백성에 대한 형벌이 가혹하여 관찰사의 탄핵으로 사임하였다. 그 뒤 사성을 거쳐 장령에 취임하였는데 세자가 토론을 게을리 한데 대한 문책으로 1754년 삭직되었다. 기개와 절조가 있는 성격으로 권귀(權貴)에게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직언하여 관도를 떨쳤다. 안정복(安鼎福)과 우정이 두터워 그의 행장을 안정복이 썼다.

정광의(鄭光毅) 1729(영조 5)~1783(정조 7).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원경(遠卿), 호는 묵재(默齋). 한양출생. 통덕랑 학신(學臣)의 아들이다. 6세에 부모상을 당하고, 1768년(영조 44) 사마시에 합격하여 1777년(정조 1) 경릉참봉(敬陵參奉)에 제수되었다. 직언을 잘 하였으며, 물러나서는 동호(東湖)에 대월루(對月樓)를 짓고 친구들과 거문고를 타고 시를 지으며 여생을 보냈다.
정기(鄭旗) 판서 강(崗)의 아들 조선 세종때에 선공부정(繕工副正) 겸 부지통례문사(副知通禮門事)를 지냈다.

정기원
(鄭基元) 1898~1986. 학자ㆍ정치인. 부산출신.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샌프란시스코대학 신학과를 졸업하였다. 또한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프린스턴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하고 경남군정장관 고문을 지냈으며, 동아대학장을 역임하였다. 1950년 제2대 민의원(부산 정, 무소속)에 당선되었으며, 1954년에는 제3대 민의원(부산 병, 자유당)에 당선되었다.

정난교
(鄭蘭敎) 1863(철종 14) ~? 조선 말기의 개화당 광렴(光濂)의 아들이다. 1882년(고종 19) 3월에 도일하여 1884년 육군호산학교(陸軍戶山學校)를 졸업하고 귀국, 그해 8월에 남행부장(南行部將), 이어 좌영군사마(左營軍司馬)를 역임하고, 그해 말 갑신정변 때 사관생도로서 개화독립당(開化獨立黨)에 가담하여 서재필(徐載弼)의 지휘를 받아 경우궁(景祐宮) 내부경호에 힘썼으며, 정변이 실패하자 김옥균(金玉均)ㆍ박영효(朴泳孝) 등과 함께 일본공사 다케조에(竹添進一郞)와 인천에 내려가 치토세마루(千歲丸)호로 일본에 망명하였다. 일본에서 유혁로(柳赫魯)ㆍ신응희(申應熙) 등과 같이 김옥균ㆍ박영효의 신변보호를 담당하였다. 우리나라에서 파견된 이른바 자객 지운영(池運永)이 소지한 암살도구인 비수와 비밀서류 등을 압수, 그 정체를 폭로하여 위험을 모면하게 하였고, 김옥균을 상해로 유인하여 보내고, 박영효를 암살하려던 자객 이일직(李逸稷)을 체포하여 일본경찰에 넘겼다. 동학농민군의 봉기와 청일전쟁을 계기로 1894년 12월 갑신정변 죄인에서 사면되고, 이를 전후해서 귀국, 이듬해 2월 통정대부(通政大夫) 정3품에 올랐으며, 군무아문참의(軍務衙門參議), 4월에 육군부령(陸軍副領)ㆍ군부대신관방장(軍部大臣官房長), 1907년 11월에는 중추원부찬의(中樞院副贊議)를 역임하였다.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에 강제로 병탄되자 조선총독부 도참여관(道參與官)으로 충청북도 근무를 임명받았으며, 1927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참의가 되었다.
정담(鄭憺) 동지 충석(忠碩)의 아들. 조선전기에 군위 현감(軍威縣監)을 지냈다.


정담수

(鄭聃壽) 1550~1604 자는 덕수(德)통덕랑 종윤(宗允)의 아들 무과에 급제하여 어란만호가 되었다. 왜적이 침법하여 변방이 소연할 때 충무공 이순신에 의해 좌선봉응양장군이 되어 모든 군무의 결정을 도왔다. 위난을 만나 제장과 더불어 곧장 적의 진영을 공격하여 영등포에서 당항에 이르기까지 적의 배 30여척을 소각시켰으므로 충무공이 그 공로를 논하여 공은 이를 사양하였다. 세상을 떠난 이듬해(1605) 1등의 공훈에 기록되었고 상신의 진언으로 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정도
(鄭道) 1567~1633 자는 이지(履之) 이조판서에 추증된 문영(文英)의 아들 1613년 문과에 올라 홍문관 응교를 지냈고 1614년 사헌부 집의로 승진하여 춘추관 편수관을 겸하였다. 광해시대를 만나 국정이 잘못되어 가자 문을 닫고 병을 요양하다가 인목대비 폐모론이 거론되어 이를 적극 저지하다가 마음대로 되지 아니하자 산속으로 들어가 금서(琴書)로 소일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에 하옥되었으나 자명소를 올리고 신흠(申欽) 오윤겸(吳允謙)의 변소로 곧 석방 되었으며 얼마 후 이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정도영
(鄭道榮) 1601~1650, 자는 영지(榮之) 1627 생원급제, 1633년 문과에 급제하여 황해도사가 되었다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정도형(鄭道亨) 1584(선조 17)~1645(인조 23).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형지(亨之). 아버지는 봉사 광전(光前)이며, 어머니는 흥양유씨(興陽柳氏)로 현령 회(淮)의 딸이다. 1628년(인조 6)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성균관에 봉직, 이어서 제용감(濟用監)ㆍ광흥창(廣興倉)ㆍ내섬시(內贍寺)ㆍ사섬시(司贍寺)의 참봉ㆍ봉사ㆍ직장을 거쳐 1631년에 전적이 되었다. 1636년 공조좌랑에 봉직할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이별하고 강화에 들어갔다가 난이 끝난 뒤에 황해도사ㆍ직강ㆍ사예를 지냈으며, 1645년 병으로 별세 천성이 관대하고 간묵(簡默)하여 희로 (喜怒)를 잘 나타내지 않고 관직생활에 청근(淸謹)하였다.
정동망(鄭東望) 1652~1700 자는 위로(渭老) 주부 호(頀)의 아들 생부는 영(?). 1678년 무과에 올랐으나 이듬해 부상을 당하였다. 1685년에 선전관에 제수되었으나 이듬해 생모의 상을 당하여 상을 마친 다음에 속리산에 들어갔는데 토포사와 함께 조령을 점령하고 있던 도적들을 소탕한 공으로 절충장군에 제수되고 다시 공주토포사가 되어 토적들을 인(仁)으로 무마하고 형으로 시위하는 한편 “너희가 너희의 죄를 안다면 내가 너희의 목숨을 살려주겠다. 너희의 본시 직업이 무엇이냐”고 하고 농사를 짓던 자에게는 농구를 주고 장사를 하던 자에게는 전곡을 주겠다고 한 뒤에 다시 도적이 되는 자는 용서치 않겠다고 엄격히 타일러 도적들이 감복하고 스스로 해산하여 경내가 편안하게 되었다. 숙천(肅川)으로 옮겨 청나라 사신이 왕래하는 요충지를 맡아 선정을 베풀어 전라좌수사로 승진하고 1693년에 통진으로 제수되었다가 옥천으로 전임된 지 1년만에 물러나 속리산에 들어갔다. 1698년 특별히 해미(海美l)에 제수되었는데 흉년이 들어 현명한 관리를 가려서 제수한 것이었으며 심력을 다하여 진휼하였다. 1700년에 충청병사로 올려 제수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부임하지 아니하고 별세하니 임금이 제문을 내렸다.
정문부(鄭文孚) 1565(명종 20)~1624(인조 2). 조선 중기의 문신ㆍ의병장. 자는 자허(子虛), 호는 농포(農圃). 서울출신. 부사 신(愼)의 아들이다. 1585년(선조 18) 생원이 되고, 1588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한성부참군이 되었다. 이듬해 홍문관수찬을 거쳐 사간원정언 겸 중학교수(中學敎授)를 역임하고 1590년 사헌부지평으로 지제교를 겸하였으며, 다음해 함경도병마평사가 되어 북변의 여러 진(鎭)을 순찰하였다. 1592년 행영(行營)에서 임진왜란을 당하였는데, 회령의 반민(叛民) 국경인(鞠景仁)이 임해군(臨海君)ㆍ순화군(順和君)) 두왕자와 이들을 호종한 김귀영(金貴榮)ㆍ황정욱(黃廷彧ㆍ황혁(黃赫)등을 잡아 왜장 가토에게 넘기고 항복하자, 이에 격분하여 최배천(崔配天)ㆍ이붕수(李鵬壽)와 의병을 일으킬 것을 의논하고 종성부사 정현룡(鄭見龍), 경원부사 오응태(吳應台), 각 진의 수장(守將)ㆍ조사(朝士)들과 합세하여 의병을 조직하였다. 먼저 국경인ㆍ국세필(鞠世弼)을 참수(斬首)하고, 이어서 명천ㆍ길주에 주둔한 왜적과 장덕산(長德山)에서 싸워 대승하고, 쌍포(雙浦)전투와 이듬해 백탑교(白塔郊)전투에서 대승하여 관북지방을 완전히 수복하였다. 1594년 영흥부사에 이어 온성부사ㆍ길주목사ㆍ안변부사ㆍ공주목사를 거쳐 1599년 장례원판결사ㆍ호조참의가 되었고, 그해 중시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1600년 용양위부호군에 이어 다음해 예조참판, 이어서 장단부사ㆍ안주목사가 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2)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다음해 남원부사가 되고 1612년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외직을 자청하였다. 1615년 부총관에 임명되고 다시 병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북인(北人)의 난정(亂政)을 통탄하여 나가지 않았다. 1623년 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전주부윤이 되고, 다음해 다시 부총관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고 있던 중 1624년(인조2) 초회왕(楚懷王)에 대해 지은 시(詩)로 인하여 박홍구의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을 받아 고문 받던 끝에 별세하였다. 뒤에 함북 지방민의 송원(訟寃)에 의해 신원(伸寃)되었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고 충의(忠毅)의 시호를 받았다. 경성(鏡城)의 창렬사(彰烈祠), 회령의 현충사(顯忠祠) 부령(富寧)의 청암사(靑巖祠) 진주(晋州)의 충의사, 의정부의 충덕사(忠德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정문영(鄭文英) 1535∼1587, 자는 자발(子發) 호는 송재(松齋) 승지()의 아들. 아들 조(造)도(道) 규(逵) 준(遵) 4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정문우(鄭文遇) (1479∼ ?) 집의 흔()의 아들 흥덕 현감(興德縣監)을 역임하였다.

정문회
(鄭文晦) 행촌공 척()의 아들 1557년 문과에 합격 광해군때 판교(判校)를 역임하였다.

정미수(鄭眉壽) 1456(세조 2)~1512(중종 7).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기수(耆), 호는 우재(愚齋).
아버지는 형조참판 영양위 종(悰)이며, 어머니는 문종의 딸 경혜공주(敬惠公主)이다. 아버지의 유배지 광주(光州)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사사(賜死)되자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소환, 세조가 길렀다. 잠저 때의 성종을 시중하다가 1473년(성종 4) 돈녕부직장ㆍ형조정랑을 지냈다. 죄인의 자손으로 임관되었다 하여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으나 성종의 무마로 무사하였다. 1476년 중부참봉(中部參奉)을 거쳐 이듬해 선전관을 지내고, 1489년 사헌부장령ㆍ사섬시첨정ㆍ한성부서윤ㆍ인천부사 등을 지냈다. 연산군이 즉위하자 당상관으로 올라 장례원판결사에 임명되고, 1496년(연산군 2)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1498년 동부승지ㆍ우승지ㆍ좌승지ㆍ도승지를 거쳐, 1502년 공조참판ㆍ지돈녕부사ㆍ한성부판윤을 지내고, 1504년 의정부참찬으로 판의금부사를 겸하였다. 1506년(중종 1) 우찬성이 되어 중종반정 때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이 되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랐으며,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이듬해 박경(朴耕)의 옥사에 연루되어 경상도 울진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나 옛 관직을 돌려받고 영경연사(嶺經筵事)에 임명되었다. 법조문에 밝았으며 문장에 능하여 유고로 한중계치(閑中啓齒)가 있다. 시호는 소평(昭平)이다.

정면
(鄭) 1614~1687 자는 여강(汝强) 호는 여우자(如愚子) 별좌 도창(道昌)의 아들 생부는 도형(道亨). 1649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 공조좌랑 예부좌랑을 거쳐 사헌부 장령으로 승진하고, 1680년에 선원보(璿源譜)를 바로잡는데 공로가 커서 보사원종공신록(保社原從功臣錄)에 수록되었다. 1683년(숙종9) 통정대부 우승지로 재직 중 서인당(西人黨)이 노소로 분열하여 논쟁이 격심할 때 송시열 송준길의 논의에 찬동하였다. 얼마 후 경연참찬관에 임명되어 부제학을 겸직하던 중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해주 정씨 가문에 보첩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기록을 모으고 전국각지에 흩어져 사는 종인들에게 통문을 돌려 족보편집에 전력을 기우리다가 별세하여 그 아들인 계주(啓周)가 마침내 1694년 갑술보(甲戌譜)를 출간하였다.
정박(鄭樸) 1621-1692 자는 자문(子文)이다. 지돈령부사를 지낸 해풍군 효준(孝俊)의 넷째 아들로 1652년(효종 3) 증광시 병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정자에 발탁되었다. 1657년 성균관 전적, 1661년 사헌부 장령으로 승진하여 자의대비 복제문제로 남인과 서인간의 예송논쟁이 일어나자 남인의 입장을 옹호하였는데 이 일로 서인의 미움을 받아 이후 벼슬길이 평탄하지 않았다. 1667년 통례원 우통례, 1668년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중국에 갔다 왔으며 1672년 강계부사로 부임하였다. 1674년 동부승지, 1677년 경상도 관찰사, 1678년 진위부사(陳慰副使)로 청나라에 갔다 돌아와 장례원 판결사에 임명되었다.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들이 쫓겨나자 공도 광주목사로 전임되어 이후 기사환국 때까지 계속 변방에 머물러 있었다. 1689년 사간원 대사간, 한성부윤, 강화유수 등의 관직을 역임하고 1691년 공조참판으로 옮겼다. 1692년 병을 무릅쓰고 아버지의 기제사에 참여하여 병이 악화되어 세상을 뜨셨다.

정봉현
(鄭鳳賢) 1794~1856 자는 덕서(德瑞) 우후 선의(善毅)의 아들 1816년 무과에 올라 칠원현감을 역임하였다. 항상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밤마다 미행하여 그들의 질고와 정황을 살폈다.

정분
(鄭汾) 통례 기(旗)의 아들 1423년(세종) 문과에 올라 예조정랑(禮曹正郞)을 역임하였다.

정붕
(鄭鵬) 1469(예종 1)~1512(중종 7).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운정(雲程), 호는 신당(新堂). 선산출신. 현감 철견(鐵堅)의 아들이며, 석견(錫堅)의 조카이다. 가학(家學)을 계승하였으며,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486년(성종 17) 진사가 되고, 1492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정자ㆍ지평ㆍ정언을 거쳐 1504년(연산군 10)교리로 있으면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영덕에 유배되었다. 무오사화ㆍ갑자사화로 많은 사림파가 주살(誅殺)을 당할 때 현명하게 처신, 몸을 보존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다시 교리에 복직되어 상경중 병으로 사퇴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그 뒤 정승 성희안(成希顔)의 건의에 따라 왕의 특지로 부름을 받았으나 홍경주(洪景舟) 등 간신배가 조정에 있음을 보고 낙향하자 청송부사에 제수되었는데, 재임 3년 만에 임지에서 별세하였다. 천성이 매우 청백하여 의가 아닌 것은 행하지 않았다. 일찍이 영의정 성희안과 젊어서부터 친교가 있었으며, 길재(吉再)ㆍ김숙자(金叔滋)의 학통과 김굉필의 가르침을 받아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고 이황(李滉)이 일찍이 그의 학문이 깊다고 칭찬하였다. <안상도 案上圖>를 지어 자경(自警)하였으며, 성리학자인 박영(朴英)이 그의 문인이다.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개령의 덕림서원(德林書院)에 봉향되었다.

정사겸
(鄭仕謙) 1520~? 자는 수행(守行). 참찬관 필(弼)의 아들. 전의 현감(全義縣監)을 역임하였다.

정석
(鄭晳) 1619-1677 자는 백야(白也), 호는 악남(岳南)이다. 지돈령부사를 지낸 해풍군 효준의 셋째 아들로 어려서부터 문명이 있었다. 1642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1649년(인조 20) 문과 별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학유에 임명되고 곧이어 추천으로 승정원 주서에 발탁되었다. 이때 <희우시(喜雨詩)>를 지어 임금의 칭찬을 듣고 범가죽을 하사받았다. 1654년 홍우원이 강빈의 신원과 두 동생의 죄를 용서할 것을 청하다 죄를 입자 이를 변론하다 영산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돌아와 세자시강원 필선을 거쳐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등에 임명되었다. 1668년 홍문관수찬, 이듬해 동래부사로 부임하였고 들어와 1672년 장례원 판결사, 좌ㆍ우승지, 병조참의, 사간원 대사간 등을 역임하고 1676년 잘못 기술된 인조반정 기사를 바로잡기 위하여 변무부사로 중국에 갔다 돌아와 공조참판, 도승지, 한성부우윤 겸 홍문관 부제학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677년 쉰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뜨셨다. 시문이 전아하고 웅장 화려하여 옛사람의 기풍이 있었으며 저서로 <<岳南集>> 1책이 세상에 전한다.

정석견
(鄭錫堅) ? ~1500(연산군 6)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자건(子健). 호는 한벽재(寒碧齋). 유공(由恭)의 아들이며, 사림파 학자인 붕(鵬)의 작은아버지이다. 1474년(성종 5)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안현감ㆍ사간원 정언을 지냈다. 1483년 천추사(天秋使)의 서장관(書將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85년 이조좌랑에 올랐다. 다음해 사헌부지평이 되어 경연(經筵)에서 원사(元史)를 강(講)하는 대신, 경서(經書)를 강할 것을 주청하기도 하였고, 곧 이조정랑으로 옮겨 보덕 허침과 <삼강행실(三綱行實)>을 산정(刪定)하였다. 1489년 사헌부장령으로 승진하였으며, 이때 유자광(柳子光)이 장악원제조로 임용되자 장악원제조는 덕망이 있는 자라야 오를 수 있는 자리라는 것을 이유로 체직을 요청하였다가 성균관사예로 전직되었으며, 경차관(敬差官)이 되어 밀양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이듬해 강경서(姜景敍) 등과 함께 사유(師儒)로 천거되었으며, 의정부 사인의 직에 있으면서 사유에 뽑혔다. 일시 김해부사로 외직에 나갔다가 1493년 동부승지에 임명되었고, 그해 제포(薺浦)에 왜인과 본국인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 문제가 크게 되자 경상도 경차관이 되어 제포에 파견되었으며, 그때 본국인의 심문을 잘못하여 국위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1495년(연산군 1)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병조의 참지ㆍ참의를 역임하였고, 2년 후 대사간을 거쳐 이조참판에 올랐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일찍이 김종직(金宗直)의 문집을 간행하였다 하여 파직 당하였다. 김종직ㆍ정여창(鄭汝昌) 등과 도의교(道義交)를 맺어 성리학을 강론하였고, 성종 때 유도인(有道人) 13인을 천거할 때 그 중의 한 사람에 들었다. 청빈하여 전도(前導)가 없이 다니니 ‘산자관원(山字官員)'이라는 별명을 듣기도 하였다. 선산 경락사(景洛祠)에 제향되었다.

정선
(鄭宣) 1546~ 1618 자는 자정(子正) 호는 퇴휴당(退休堂) 사직 언충(彦忠)의 아들. 1592년 왜변이 나자 문두원(文頭院)에 의병소를 설치하고 한남에 격문을 보냈다. 이 때 조헌 고경명이 그 소식을 듣고 “한동에도 또한 사람이 있었는가 정공은 참으로 의사로다” 하였다. 여주 이천 광주에서 300여명이 백의종군하고 향병을 규합하여 군세가 점점 진작되고 자주 왜적을 쳐서 승리하였다. 북병사 정문부가 북관의 반민과 왜적을 치다가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 이르기를 “족숙 또한 창의하여 이에 이르렀으니 이 어찌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아름다운 덕행이 아니랴”고 하였다. 군공으로 예빈시 부정(禮賓寺 副正)의 벼슬을 내렸으나 벼슬을 하지 않고 건금산에 퇴와(退臥)하였다.

정선
(鄭選) 1768 ~1821 초휘는 선(璇) 자는 여칠(汝七) 호는 화재(和齋) 유성(惟城)의 아들 생부는 군수 유철(惟轍) 정조(正祖) 1795년에 무과(武科)에 올라 바로 선전관이 되었다가 1796년에는 도총부 도사(都摠府都事)와 내금위(內禁衛)로 옮겼고, 1797에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로 임명되었다. 8척이 넘는 장신에 음성이 천둥 소리와 같고 안광(眼光)이 횃불 같았으며 여력(膂力)이 뛰어나 철여의(鐵如意)를 부러뜨렸다. 임금이 훈련원에 거둥하여 뭇 신하들을 모아놓고 무예(武藝)를 시험할 때, 공이 철궁(鐵弓)을 당겨 원목(院木)을 향해 발사하니, 아름드리나무가 시위소리를 따라 부러져 그 소리가 온 원내(院內)를 진동시켰다. 임금이 크게 칭찬하는 한편, 어전(御前)에서 공의 이름을 선(選)으로 하사하고, 그날로 사헌부 감찰 겸 호위장(司憲府監察兼扈衛將)에 임명하였다. 마침 권문(權門)에서 세력을 믿고 불법을 자행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공이 감찰의 규례를 들어 그 집 대문을 묵쇄(墨刷)하였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오늘에 다시 총마어사(驄馬御使:후한때 강직하기로 유명했던 桓典을 말함)를 구경하게 되었다.』하였다. 그 뒤부터 시기하는 자가 많아지고 두려워하는 자가 집중되어 경망(輕妄)하다는 죄목으로 호남에 정배(定配)되었다가 번암 채제공(蔡濟恭)의 주청으로 풀려났다. 1800년 6월 정조가 승하하자, 지기(志氣)가 풀려 세상에 대한 생각이 없어져서 고향으로 돌아와 구원(九原)에 뜻을 붙이고 책상에 그득한 금서(琴書)와 정원에 심어둔 꽃과 대나무로 한가로운 의취를 즐겼다. 1802년에 큰 흉년이 들었는데 금 수천관과 곡식 수백곡을 털어 향리(鄕里)의 빈궁한 자를 구제하였으므로 그 송덕비(頌德碑)가 온 경내에 자자하였다. 1820년에 훈련원 정(訓鍊院正)에 임명되고, 1821년에는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진되었다가 바로 첨중추 겸 충장위장(僉中樞兼忠壯衛將)에 임명되어 성근(誠勤)을 다하였다.

정선의
(鄭善毅) 1767~1823 자는 양오(養吾) 호는 한옹(閑翁) 처사 식(埴)의 아들. 1800년에 무과에 올라 1812년 홍경래의 난 당시 선전(宣傳)으로서 토벌을 자원하였으나 조의(朝議)에서 시종지신으로서 잠시도 연곡(輦轂 임금이 타는 수레)을 떠날 수 없다고 하여 불허하자 몹시 안타까워하였다. 1820년 안주 우후겸 토포사(安州虞侯兼討捕使)에 임명되었다.

정성
(鄭晟) 정당문학 윤경(允卿)의 아들 고려조에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를 지내고,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증직되었다. 고려사를 보면 충선왕 4년 5월 임인(壬寅)에 왕이 대호군으로 치사한 정성(鄭晟)을 보내 역대실록을 송환(送還)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정수경
(鄭守慶) 현감 담(憺)의 아들 조선 중종 무렵에 청도 군수(淸道郡守)를 역임하였다.

정수호
(鄭壽豪) 1508-1569 자(字)는 기로(耆老). 참찬관 필(弼)의 아들. 문과에 급제하여 안동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정술조
(鄭述祚) 1711-1788 자는 효선(孝善) 사호(賜號)는 삼춘당(三春堂). 동지중추부사 진형(震衡)의 아들 1750년 전시(殿試)에 급제 1756년 지평(持平)으로서 송시열 송준길 두 선생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소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1759년 선춘방 지제교(選春坊 知製敎), 1766년 중시하여 통정에 오르고 1784년(정조8)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에 제수되어 일강입시(日講入侍)하다. 1787년(정조11) 한성판윤 형조판서를 역임하고 다음해 치사하고 봉조하(奉朝賀)하다

정숭의
(鄭崇義) 대제학 여(旅)의 아들 조선 초에 희천 군수(熙川郡守)를 역임하였다.

정승
(鄭勝) 1579~1632 자는 길보(吉甫) 오정공 용(鎔)의 아들. 1617년(광해군 9) 문과에 급제 서궁분승지(西宮分承旨)를 역임하였다.

정식
(鄭植) 1615(광해군 7)~1662(현종 3).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자고(子固). 호는 백교(白郊)라 하였다 지돈녕부사 해풍(海豊君) 효준(孝俊)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이진경(李眞卿)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출중하여 1642년(인조 20) 사마시에 합격한 뒤 1650년(효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발탁되고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어 유생들을 위해 바른 말로 다투다가 거산찰방으로 좌천되었다. 대신들의 주청에 따라 곧 조정에 들어와 시강원문학, 사헌부의 지평ㆍ장령을 거쳐 세자시강원 필선에 임명되었으나 부모 봉양을 위해 남양부사로 부임하였다. 질병으로 자리를 옮겨 사복시와 상의원(尙衣院)의 정(正)에 임명되었으나 1662년 감기로 세상을 떠났다. 맏아들 중휘가 참판에 오르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해원군(海原君)의 군호를 받았다. 성품이 청렴결백하고 인심이 후덕하여 만인의 추앙을 받았다.

정식
(鄭栻) 1638-1746 조선 영조때의 지사. 자는 경보(敬甫) 호는 명암(明庵) 동지(同知) 대형(大亨)의 손자.어려서 부모를 잃고 재종형 노정헌 구(露頂軒 構) 밑에서 공부하여 학문에 정통하였다. 8세에 벌써 글을 지었고 젊어서 과옥(科屋)에 나가 호담암(胡澹庵 : 胡詮)의 척화소(斥和疏)를 읽고 비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여 드디어 유건을 찢어버리고 패랭이를 쓰고 명산대천으로 돌아다니고 집에 들어와서는 경사를 공부했다. 만년에 두류산의 무이구곡에 집을 짓고 제갈량(諸葛亮) 주희(朱憙)의 초상을 모사 봉안하여 놓고 세상일을 잊어버리고 홀로 즐겼다. 생활이 극도로 가난하여 고사리와 솔잎으로 끼니를 이으면서도 태연하게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고 유집 5권이 있다. 최근 산청의 명덕사에 제향되었다.

정신
(鄭愼) 1538(중종33) ~1604(선조37). 자는 군성(君省) 1565년 율곡과 동방으로 을과 1위로 급제하여 통정대부 내자시정, 대사간을 역임하고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정언
(鄭) 고려(高麗) 때 소부 소윤(少府少尹)을 지내고 정헌대부(正憲大夫)ㆍ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정언각
(鄭彦慤)1498(연산군 4)~1556(명종 11).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근부(謹夫). 진사 희검(希儉)의 아들이다. 1516년(중종 11) 생원이 되고, 1533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검열을 거쳐 1537년 박사에 이어 정언ㆍ지평ㆍ장령ㆍ교리ㆍ응교ㆍ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546년(명종 1) 직제학으로 춘추관편수관을 겸하여<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사응원정ㆍ검상ㆍ사인 등을 지냈고, 1547년 부제학으로 재임시 전라도 양재역(良才驛)에서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李)등이 권세를 자행(恣行)하여 나라가 장차 망하려고 하니 이를 보고만 있을 것인가?”이로 인하여 을사사화의 잔당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하여 봉성군(鳳城君 : 중종의 아들)ㆍ송인수(宋麟壽)ㆍ이약빙(李若氷)등을 죽이고, 권벌(權橃)ㆍ이언적(李彦迪) 등 20여명을 유배시킴으로써 윤원형(尹元衡)일파가 정권을 장악하게 하였다. 도승지ㆍ판결사를 거쳐 1551년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고 물러났다가 이듬해 동지중추부사로 다시 등용,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경상도 관찰사ㆍ한성부판윤 등을 거쳐 1556년 경기도관찰사로 있을 때 낙마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정여
(鄭餘) 예조판서 윤진(允珍)의 아들 조선 초에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정여
(鄭旅) 판서 강(崗)의 아들 1408년( 태종8)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직제학(直提學) 예조판서(禮曹判書) 겸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 지성균관춘추관사(知成均館春秋館事) 등을 지냈다.

정여충
(鄭汝忠) (1539~1608) 자는 공서(公恕), 호는 매창(梅窓), 교위 승선(承先)의 아들. 생부는 승윤(承尹), 1573년 생원시에 급제하고 1593년 왜란시에 황해도 연안에서 의병을 일으켜 당시 연안부사 이정암(李廷馣)과 합세하여 약 5,000명의 군사로 화공법으로써 약 7배나 되는 왜적을 격퇴하였다. 당시 화공법은 마을 부근 민가에 청솔가지를 쌓고 불을 놓아 연기를 수일간 배출케 하고 아군 복장을 흙색으로 입고 눈만 내놓고 창을 가지고 집 한 채에 수십명이 매복하고 있다가 왜적이 나타나면 출격하여 격퇴시키는 전법이다. 이정암의 주청으로 3등공신이 되고 우봉현령에 제수되었다.

정역
(鄭易) ? ~1425(세종 7).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순지(順之), 호는 백정(柏亭). 아버지는 정용낭장 판예의사사(判禮儀司事) 윤규(允珪)이며, 어머니는 대사성 설문우(薛文遇)의 딸이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장인이다. 1383년(우왕 9) 이방원(李芳遠)과 함께 문과에 급제하여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좌정언ㆍ교주도안렴부사(交州道按廉副使)ㆍ사헌부지평ㆍ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등을 역임하고, 1411년(태종 11)에 한성부윤으로 정조부사(正朝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다음해 대사헌이 되었다. 1414년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예조ㆍ형조의 판서를 지내고, 1416년 대제학을 거쳐 호조판서가 되었다. 1419년(세종 1)에 판한성부사ㆍ좌찬성, 다음해에 호조판서를 거쳐 집현전 대제학(集賢殿 大提學)이 되었다. 사림의 중망(重望)으로 4조(朝)를 섬기는 데 한결같았고, 내외의 자손 수십명에 복록을 겸비하였으나 더욱 스스로 겸손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정도(貞度)이다.

정연경
(鄭延慶) 자는 흥조(興祚) 참의 침(忱)의 아들. 조선 성종조에 음보로 건원릉 참봉,상서원 직장,마전군수를 역임하면서 최상의 치적으로 통정의 품계에 올라 철원부사에 제수되었다.

정염
(鄭恬) 동지 충석(忠碩)의 아들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낭천 현감(狼川縣監)을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정영
(鄭韺) 1610~ 1679 자는 화숙(和淑) 증 병조참판 사중(思中)의 아들 1635년 갑과에 뽑혀 인의(引儀) 참군(參軍)에 제수되고 병자년(1635) 겨울에는 감찰로서 임금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에서 총융사 이시백(李時白)의 막하에 있었다. 성위에 서서 방어하다가 오랑캐의 칼에 맞아 부상을 당하였으나 상처를 싸매고 더욱 분발하여 종일 화살을 쏘았으므로 특별히 훈련원 정(訓練院 正)에 제수되었다가 창성부사에 승진되고 가을에 순천영자에 제수되었다가 군어(軍御)에 제수되고 이윽고 춘천부사 경원부사 길주부사를 거쳐 호남의 좌우수사(左右水使)로 승진되었다. 효종이 즉위한 후에 충청수사에 제수되었다가 경상우병사로 옮겼다. 얼마 안되어 그만두고 돌아와 “금의로 고향에 돌아오니 이미 최고의 영행(榮幸)이다. 만약 만족할 줄 알지 못하면 반드시 후회가 있을 것이다”하였다 뒤에 총관(摠管)으로 부르자 병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8척 신장으로 기우(器宇)가 헌앙하였으며, 일생동안 소인을 미워하고 권귀에 아부하지 않았다.

정운유
(鄭運維) 1704(숙종 30)~1772(영조 48).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지국(持國)ㆍ참판 필녕(必寧)의 아들이다. 1735년(영조 11) 생원시를 거쳐 1756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장령ㆍ승지를 지냈다. 그 뒤 여주목사로 이속(吏屬)과 결탁하여 전세를 포탈하는 자를 응징하고, 흉년이 들자 징세를 감면, 자신의 재산을 처분하여 기민(饑民)에게 나누어 주는 등 목민관으로서의 치적이 높았다. 이어 대사간ㆍ한성부우윤ㆍ도승지ㆍ대사헌을 지내고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익정(翼靖)이다.

정운홍
(鄭運弘) 1686~1729. 자는 계의(季毅) 진사 덕녕(德寧)의 아들. 1728(영조4)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역임하였다.

정원희
(鄭元禧) 1527~1568 자는 경수(景綬). 조선 명종조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으며 해령군(海寧君)에 책봉되었다.

정유공
(鄭由恭) 조선 초기의 문신 영동정 희언(希彦)의 아들. 교도관에 제수되어 생도를 교유하는데 정성과 직무를 다하여 그 명성이 널리 전파되어 조정에 까지 알려지자 가선대부 동지의금부사로 승진하였다. 매계 조위(梅溪 曺偉)가 “감문(甘文: 경북 김천)의 사람들이 본디 술주정만 일삼고 학업에 힘쓰지 않다가 정씨가 주거한 이후로 후학을 권장하고 풍속을 바로 잡았다”고 하였다

정유철
(鄭惟轍) 1743~1799. 자는 명준(明準) 윤신(胤新)의 아들 1784년 무과에 오르고 선전관으로 있다가 운산(雲山)군수로 나가 백성을 다스리면서 항시 선조 신당 정붕(新堂 鄭鵬)선생의 “잣은 높은 산봉우리 위에 있고 꿀은 민간의 벌통 속에 있다”는 구절을 좌우에 써 붙여 놓고 아침저녁으로 경계를 삼았다.

정윤경
(鄭允卿) 고려조(高麗朝)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였다.

정윤경
(鄭胤慶) 자는 향수(鄕數). 생원 변(忭)의 아들 조선 전기에 참봉(參奉)을 지냈다.

정윤규
(鄭允珪) 고려 때 정용낭장(精勇郎將) 판예의사사(判禮儀司事)을 지냈다.

정윤진
(鄭允珍) 고려에서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정을경
(鄭乙卿) 자(字)는 선보(善輔), 호(號)는 해정어수(海亭漁叟). 부사 인노(仁老)의 아들. 조선초기에 남양부사(南陽府使)와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지내고 좌의정(左議政)에 추증되었다

정익
(鄭) 1617~1683 자는 자제(子濟), 호는 욱헌(旭軒)이다. 아버지는 해풍군 효준으로 지돈령부사를 지냈다. 해풍군의 둘째 아들로 어려서 문리가 트여 1639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642년(인조 20) 식년과 명경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성균관을 거쳐 1648년 사헌부 감찰에 임명되었다. 이후 사간원 정언, 세자시강원 문학, 사헌부 지평 등의 관직을 역임하고 1655년 황해도 연안부사로 나가 남대지(南大池)를 개수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1659년(효종 10) 사간원 헌납에 임명되었으나 궁가(宮家)의 사유지 불법 조성을 간언하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효종이 죽자 고부승습청시사(告訃承襲請諡使)로 중국에 사신 갔다 왔으며 동부승지, 장례원 판결사, 병조참의를 역임하다가 1663년 풍덕부사로 나갔다. 1677년 형조참의, 이듬해 강원도 관찰사에 임명되고 1670년 하정부사(賀正副使)로 중국에 갔다와서 형조참판, 한성부윤 등을 역임하였다. 1674년 강화유수, 1676년 도승지, 병조판서, 이듬해 지중추부사, 이듬해 한성부윤, 강화유수를 역임하였다. 1680년 경신대출적이 일어나자 1670년 하정부사로 갔을 때의 일에 관련되어 영덕으로 귀양을 갔다가 1682년에 풀려났다. 이때부터 벼슬에 뜻이 없어 동대문 밖에서 한가로이 지내다 전염병으로 1683년에 세상을 떠났다.

정인로
(鄭仁老) 고려 판중추 성(晟)의 아들. 1443년(세종 25)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감찰장령(監察掌令)ㆍ남양 부사(南陽府使)를 지내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추증되었다.

정인서
(鄭麟瑞) 1587~1617. 자는 사인(士仁) 1603년 전시에 합격하여 한원(翰院)에 선발되었다가 국자전적에 올랐고 홍문관 수찬(修撰) 교리(校理)를 역임하고 1607년 봉상판관이 되고 1615년 진주제독(晋州提督)이 되었다.

정일각
(鄭一覺) 찬경(纘慶)의 아들 조선 전기에 언양 현감(彦陽縣監)을 역임하였다.

정일녕
(鄭一寧) 1666~1718 자는 일지(一之). 1707년 문과에 급제하고 숙종때 능주목사(綾州牧使)를 역임하였다.

정적(鄭積) 1635~1672 자는 계직(季直)이다. 해풍군 효준의 막내아들로 1662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를 시작으로 성균관 전적, 서학교수, 예조와 병조의 원외를 역임하였다. 1670년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을 거쳐 이듬해 사헌부 장령으로 승진하여 서장관으로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업무를 수행하다가 병을 얻어 머물다가 이듬해 고국으로 돌아오던 중 사령에서 세상을 뜨셨다. 판서 임상원, 지돈녕부사 윤심과 두터운 친교가 있었다.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정철조
(鄭喆祚) (1730~1781) 자는 성백(城伯), 호는 석치(石癡), 공조판서 운유(運維)의 아들. 1774년(영조50)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正言)을 역임하였다. 문인으로서의 도와 뛰어난 재주가 있었으며 이용후생학(利用厚生學)에 치중하였으며 단순한 유자가 아니었다. 홍대용(洪大容), 이서구(李書九), 박제가(朴齊家) 등과 교유하였으며 기중기, 도르래, 맷돌, 수차 같은 기계들을 직접 설계하고 제작까지 했다. 집 방안에는 천문기구가 가득 차있고 서양천문학에도 상당히 조예가 깊었다. 지도제작에도 뛰어나 당시 가장 우수한 지도인 「여지도」를 만들었고 서화에도 뛰어나 정약용이 공의 용그림을 극찬한 글이 있으나 전하는 그림이 없어서 안타깝다. 또 벼루를 잘 새겨서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정조

(鄭造) 1559(명종 14)~1623(인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시지(始之). 승지 척()의 손자로, 문영(文英)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홍순(洪純)의 딸이다. 1590년(선조 23) 생원ㆍ진사 양시에 합격하고,1605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이첨(李爾瞻) 윤인(尹) 등과 함께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죽이려 하였으나 박승종(朴承宗)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1617년 다시 폐모론을 제기하여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시키는데 적극 가담하였고, 다음해 부제학ㆍ대사성을 거쳐 1619년에는 대사간이 되었다. 1621년 형조참판을 지내고, 1622년 부제학ㆍ동지의금부사로 있다가 인조반정으로 정국이 역전되면서 동생인 의주부윤 준(遵), 집의 도(道), 대사간 규(逵)와 함께 화를 입었다.


정종
(鄭悰) ?~1461(세조 7). 조선 초기의 문신. 참판 충경(忠敬)의 아들. 1450년(세종 32)에 문종의 딸 경혜공주(敬惠公主)와 혼인한 뒤 영양위(寧陽尉)에 책봉되었고, 단종이 즉위하자 단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1455년(단종 3)수양대군의 제거를 도모하였던 금성대군 유(錦城大君 瑜)와 친교가 있었다 하여 영월에 유배되었다. 이해에 수양대군이 즉위하였는데, 문종의 유일한 사위라 하여 경기도 양근(陽根) 수원 통진에 이배 되었으나, 1456년(세조 2) 사육신사건으로 죄가 가중되어 다시 광주(光州)로 옮겨졌다. 1461년 승려 성탄(性坦)등과 반역을 도모하였다 하여 사사되었다. 그와 함께 유배되어 관비(官婢)가 된 경혜공주가 적소에서 아들을 낳자, 세조비 정희왕후(貞喜王后)가 친히 양육하고 세조가 미수(眉壽)라 이름 하였다. 뒤에 아들 미수가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에 봉해지자 영의정 영양부원군에 추증되고 헌민(獻愍)의 시호를 받았다. 영월의 장릉(단종묘)과 공주 동학사(東鶴寺) 숙모전(肅慕殿)에 배향되었다.

정종현
(鄭宗鉉) 1804~1871 자는 치굉(致宏) 진(璡)의 아들 1834년 무과에 오르고 부사과 사헌부감찰을 거쳐 선전관에 임면되었다. 1856년 곽산(廓山)군수로 나가고 1857년에는 부령부사로 이임되었다. 1864년에는 청주영장에 임명되어 무비를 강화하고 군정을 강화하여 언제나 쓰일 수 있도록 하였다. 외직에서 항상 성적이 상위에 들었으므로 부령에 있을 때 수의(繡衣: 암행어사)가 보고하기를 “성직(誠直)한 성격으로 근려(勤勵)한 치도를 행하여 규령(規令)이 실현되고 향약이 새로 각 방에 반포되어 단속이 엄격하니 이속(吏屬)이 다 초정(初政)에 무서워했다”라고 하였다. 1866년 양이가 강화를 침범하자 고향에서 향곡에 통문을 날려 군량을 모아 도적을 토벌할 것을 간절히 호유하였다.

정종형
(鄭從衡) 자는 평숙(平叔) 참봉 계경(繼慶)의 아들 조선전기에 지례 현감(知禮縣監)을 역임하였다.

정준
(鄭遵) 1580(선조 13)~1623(인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행지(行之). 언각(彦慤)의 증손으로, 문영(文英)의 아들이며, 조(造)의 동생이다. 1610년(광해군 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광해군 때 다시 설치된 독서당(讀書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지평ㆍ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형 조(造)와 더불어 1613년 계축옥사 및 폐모론 등에 대북파의 일원으로 가담하여 반대파를 제거하는 데 주동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교리ㆍ이조정랑 등을 거쳐 1621년에는 의주부윤으로 있으면서 명 청의 정세를 탐지하여 광해군의 외교에 크게 기여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광해군의 총신(寵臣)이었던 죄로 의주에서 별세하였다.

정준교
(鄭準敎) (1881~1946) 자는 태규(泰奎), 호는 서주(西州), 광승(光升)의 아들, 생부는 광린(光麟). 1910년 조선이 일본제국에 합방되자 국권회복을 위하여 서울 만주 등지를 전전하다가 1919년 서울의 손병희 선생 진주의 김재화, 박진환, 강달영, 심두섭, 이강우, 박용근, 강상호 등 동지들과 손잡고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여 1919. 3. 19. 드디어 진주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이로 인하여 징역 3년을 복역하였으며 건국훈장애족장을 받았다.

정중만
(鄭重萬) 1658~ 1732 자는 여일(汝一) 호는 백석(白石) 필선 식(植)의 아들 14살에 현종이 인평대군의 아들과 혼인하게 하였고 18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젊어서부터 글씨를 잘 써서 대권안의 여러 편액을 썼다. 1689년 사옹원 직장이 되었다가 익위사 부솔(副率)로 옮겼다. 이듬해 죄없이 철산으로 귀양 갔다가 1694년에 풀려 돌아와 위솔랑(衛率郞) 형조감(刑曹監)으로 승진되고 안음현 현감으로 나가게 되었다. 아껴 쓰고 남는 것으로 제민고(濟民庫)를 처음 만들었다. 황간현감으로 나가 다스리는 일이 가장 뛰어난지라 청도군수로 승진되었다. 이어 함열 양근 진산의 각 군수와 의금부 도사 형조정랑 충훈부도사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 전라도 찰방을 역임하였다. 1728년 한성주부로 원종공신에 참여하여 아버지 필선공을 이조판서로 추증 받게 했다. 또 공조정랑과 사도시 첨정을 지냈다. 현재 정곡빌딩 동·서관 앞의 鄭谷이라는 표석은 공의 필적이다.

정중휘
(鄭重徽) 1631-1689.의 자는 신백(愼伯), 호는 돈곡(敦谷)이다. 세자시강원 필선을 지낸 해원군 식(植)의 맏아들. 1657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정자에 발탁되고 예문관 검열을 거쳐 성균관 전적으로 승진하였다. 1662년 사헌부 지평, 1665년 강원도 도사, 1672년 세자시강원 필선을 역임하고 1675년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들어와 좌승지, 도승지로 승진하고 예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당시의 일에 관련되어 양주로 귀양 갔다. 1678년 사면되어 장례원 판결사, 병조참의를 역임하고 1680년 해흥군의 군호를 받았다. 그러나 경신대출척으로 벼슬길도 막혀 집안에 머물다가 몇 년 뒤에 광주목사로 부임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이 일어나 남인의 서인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행해지자 이를 변론하다 벼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곧 형조참판에 임명되어 인현왕후 폐위를 저지하기 위하여 유생들에게 각자 글을 지어 올리게 하는 등 인현왕후 폐위에 반대하였으나 집권층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곧이어 경기도 관찰사, 동지의금부사, 한성부윤 등을 역임하다 1697년 별세.


정지신

(鄭趾新) 1722~ 1787 자는 군우(君又) 부사 찬()의 아들 1742년 무과에 급제하여 1743년에 해남에 나갔다가 1745년에 곡성으로 이임되었다. 얼마 후에 횡성으로 부임하여 가는 곳마다 선치를 베풀어 특별히 상주진(尙州鎭) 중영장 겸 토포사(中營將 兼 討捕使)에 제수되었다.


정집녕
(鄭輯寧) 1690~1749 자는 방경(邦卿) 동지 중협(重協)의 아들 생부는 중엽(重 燁), 문과에 급제하고 흥양현감(興陽縣監)을 지냈다.


정찬

(鄭)1759~ 1811 자는 경천(擎天) 위세(緯世) 1785년 무과에 오르고 1789년에 선전관이 되었다가1793년에 무신 겸 선전관이 되었다. 1795년 경상도의 우후로 절충장군에 승진되었다가 박천(博川)으로 나가 은위를 베풀었고 단천 경흥을 차례로 다스리면서 예의로써 가르치고 성경으로써 인도하여 매번 수의(繡衣)의 표창과 이민(吏民)의 거사비(去思碑)가 있었다


정척

(鄭) 1517(중종 12)~1596(선조 29).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군길(君吉), 호는 행촌(杏村).호조참판 언각(彦慤)의 아들이다. 1543년(중종 38) 사마시에 합격하고, 1549년(명종 4)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수찬ㆍ교리ㆍ정언ㆍ지평ㆍ장령ㆍ사간ㆍ우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67년 양사의 탄핵을 받아 상주목사에서 파직 당하였다가, 1592년(선조 25)에 풀려나 중추부첨지를 지냈다. 뒤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정철견
(鄭鐵堅) 자(字)는 강수(剛), 호(號)는 송정(松亭). 교도 유공(由恭)의 아들. 현감을 지냈다. 김종직 김굉필 등과 내왕하고 도학과 문장으로 추앙 받았다.

정초
(鄭初 일명 礎). 조선 태종 때 전라도 도진무사(全羅道都鎭撫使) 겸 도절제사(都節制使)를 거쳐 진서 대장군(鎭西大將軍)을 역임하였다.

정충경
(鄭忠敬) ?~1443 정도공 역(易)의 맏아들이며 영양위 종(悰)의 아버지. 음직으로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출생연대 성장과정 및 초기관력은 알려져 있지 않다. 1438년 동부승지, 1440년 우부승지 이듬해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그 이듬해 한성부윤에 임명되어 중국에 사신 갔다 오고 1443년 전라도 관찰사 중추원부사로 재임하던 중 별세.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정충석
(鄭忠碩) 1406~1473 자는 효부(孝夫). 정도공 역(易)의 둘째아들 음직에 의하여 1424년 수의부위좌군 부사정에 임명된 이후 1438년 사헌부 감찰, 1445년 한성부 판관, 1451년 한성부 소윤, 1457년 판군자감사를 역임하였다. 1464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오고 1466년(세조12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事)에 올랐다. 배위는 문충공 정몽주(鄭夢周)의 손녀이다.


정침

(鄭)1424(세종 6)~1485(성종 16).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불기(不欺), 호는 정안재(靜安齋).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충석(忠碩)이며, 어머니는 정종성(鄭宗誠)의 딸이자 정몽주의 손녀이다. 1453년(단종 1)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고 1455년 감찰이 되었으며 1475년(성종 6) 행사직(行司直)이 되었고, 이해 음률(音律)에 조예가 깊어 장악원 주부가 되었다. 1478년 예조정랑이 되었으며, 그 뒤 직제학을 거쳐 호조참의에 이르렀다.


정필(鄭弼) 1483~1542 참봉 윤경의 아들 자세한 경력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중종때 가선대부 찬성사가 되었는데 한결같은 마음으로 봉직하여 밤낮으로 게을리 함이 없었으며 간언이 곧아 숨김이 없었고 지론이 공정하여 사가 없었으며 집법이 정대하여 흔들림이 없었으므로 임금이 “옛날에 어진 보필이 있었는데 경의 이름이 과연 헛되이 얻어지지 않았다”(공의 휘가 필(弼)이므로 이를 말한 것임)라고 하면서 큰물에 다니는 배와 가문 날에 내린 비에 비유하였다.

정필녕
(鄭必寧) 1677~1753 자는 시경(諡卿) 호는 순암(順庵). 장령 적()의 손자. 1714년(숙종43) 문과 중시에 급제, 1731년 통정대부, 1749년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정호학
(鄭好學) 1560~ 1642 자는 민이(敏而) 호는 봉헌(蓬軒) 주부 연(淵)의 아들. 1591년 이선(里選)에 의하여 현릉(顯陵) 참봉이 되고 정릉(靖陵)에 제수되었다가 경기전(慶基殿)으로 옮겼다. 1594년에 부모상을 만나고 1609년에 다시 후릉(厚陵) 참봉이 되었다가 군자감 부봉사 상서원 부직장으로 옮겼다가 통례원 인의(通禮院 引議)로 승진되고 사복시 주주로 옮겼다. 1617년 용안현감으로 나갔다가 대흥현으로 바뀌었는데 광해군 때에 물러났다가 인조반정 뒤에 바로 연기현에 제수되었다. 1625년 세자책봉에 따라 익위사 사어(翊衛司司禦)가 되었다가 이듬해 익위(翊衛)로 승진하고 1627년에 정선군수가 되었는데 1629년에 체귀(遞歸)되었다.

정홍도
(鄭弘道) 군수 수경(守慶)의 아들 조선 전기에 호조 정랑(戶曹正郞)을 지냈다.

정홍석
(鄭鴻錫) 1869~1918 자는 윤조(允祚) 희원(喜元)의 아들 생부는 환교(煥敎) 1894년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의 직을 역임하였다. 1905년 당시 비서감랑으로 있으면서 한일협상조약을 맺은 대신들에 대하여 비서감 랑(秘書監郞) 정홍석(鄭鴻錫)이 상소하였는데 그 요지는 이러하였다. “옛날 백비가 오(吳) 나라를 팔아먹고 진회(秦檜)가 송(宋)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몇 년 동안이나 머뭇거렸고 많은 시간에 걸쳐 짜고 들었습니다. 지금 하루저녁에 ‘가(可)'자 한 자를 써서 무거운 한 나라를 떠넘겨준 이런 간사한 역적으로 말하면 백비를 능가하고 진회를 뛰어넘은 자들이니 빨리 여러 역적들의 죄를 다스림으로써 나라의 법을 바로잡을 것입니다.” 비답을 내리기를, “이미 경이 올린 상소에 대해 비답을 내린 바 있다.”라고 하였다.


정효준

(鄭孝俊) 1577(선조 10)~1665(현종 6).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효우(孝于), 호는 낙만(樂晩). 돈녕부판관 흠(欽)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시명이 높았고, 특히 변려문(辯儷文)에 뛰어났으나 과거에 여러 차례 낙방하다가 1618년 늦게서야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이이첨(李爾瞻)ㆍ정인홍(鄭仁弘) 등 대북파에 의하여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이 대두되었을 때, 어몽렴(魚夢濂)ㆍ정택뢰(鄭澤雷) 등과 함께 극력 항소하여 이이첨 등의 처형을 주장하였다. 이로 인하여 두 사람은 유배당하였으나 공은 북관에 피신하여 화를 면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이후에 서용되어 효릉참봉(孝陵參奉)ㆍ전생서 봉사(典牲暑奉事)ㆍ자여도 찰방(自如道察訪) 등을 거쳐 1652년(효종 3) 돈녕부 도정에 올랐다. 1656년 80세의 나이로 해풍군(海豊君)에 습봉되고 동지돈녕부사가 되었다. 그 뒤 아들 다섯이 모두 급제하여 관직에 오른 관계로 김수항(金壽恒)의 주청에 의하여 1663년 판돈녕부사가 되었다. 시호는 제순(齊順)이다.


정휘주

(鄭徽周) 1650~1692 자는 미숙(美叔) 욱(勖)의 아들 1687년 문과에 급제 주서(注書)를 역임하였다.


정흔
(鄭)동지 충석(忠碩)의 아들 1456년(세조2) 문과에 급제하고 집의(執義)를 역임하였다.

정흠
(鄭欽) 1557~1635 초명은 득몽(得夢), 자(字)는 흠재(欽哉), 호(號)는 송천(松泉). 대흥 현감(大興縣監)ㆍ양천 현령(陽川縣令)을 거쳐 돈령부 판관(敦寧府判官)을 지냈으며 해성군(海城君)에 봉하여졌다.

정흥경(鄭興慶) 1451~1525 자는 길보(吉甫) 참의 침() 1469년 음보로 전력부위가 되고 1485년에 사용부사정(司勇副司正)에 임명되었고 1498년에 북부참봉이 되고 1501년에 전옥 서로 옮겼으며 1504년에 풍저창봉사(豊儲倉奉事)로 전임하고 1504년에는 사온서(司署)로 옮기고 1507년에는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그 복을 마친 후 1512년에 사재감 직장(司宰監直長)에 서용되었다. 1513년에 사도시 주부로 승격하고 1514년에는 연산현감으로 나아가 그 임기가 끝난 후 선공감 판관이 되고 얼마 후 사온서령으로 옮겼다. 1520년에 한성부 판관이 되고1521년에 사품계에 올라 사재감 사도시(司寺)의 첨정을 역임하고 그해겨울에 청도군수로 나갔다. 부임한지 5년 만에 연로로 물러났는데 읍인들이 유임을 호소하였다. 조정에서 다시 부임할 것을 특명하여 백성들의 여망을 따르려 하였으나 떠나기 전에 병으로 별세하였다.


정희량
(鄭希良) 1469(예종 1)~?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순부(淳夫). 호는 허암(虛庵). 철원부사 연경(延慶)의 아들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92년(성종 23)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예문관 검열에 임명되었다. 1492년 성종이 죽자 궁중에서 불사를 크게 일으키려고 하여 태학생(太學生)ㆍ유생(儒生)들과 더불어 불사의 부당함을 직간하였다. 그러나 상소의 내용 중 지나친 것이 있다하여 이듬해 해주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1495년(연산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의 정자 검열을 거쳤다. 이듬해 김전(金詮)ㆍ신용개(申用漑)ㆍ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될 정도로 문명이 있었다. 1497년 예문관대교에 보직되어 ①임금이 마음을 바로잡아 경연(經筵)에 근면할 것, ②간언을 받아들일 것, ③현사(賢邪)를 분별할 것, ④대신을 경대(敬待)하며, 환관을 억제할 것, ⑤학교를 숭상하며 이단을 물리칠 것, ⑥상벌을 공정히 하고 재용(財用)을 절제할 것 등의 소를 올린 바 있다. 다음해 선무랑ㆍ행예문관봉교로서《성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무오사화 때에는 사초문제(史草問題)로 윤필상(尹弼商)등에 의하여 신용개ㆍ김전 등과 함께 탄핵을 받았는데, 난언(亂言)을 알고도 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장(杖) 100, 유(流) 3,000리의 처벌을 받고 의주에 유배되었다가 1500년에 다시 김해로 옮겨졌다. 유배지에서 조위(曺偉)와 시로 서로 화답하였다. 그해 어머니가 죽자 고양에서 수분(守墳) 하다가, 산책을 나간 뒤 다시 돌아오지 않고 은둔하였다. 총민박학(聰敏博學)하고 문예에 조예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음양학(陰陽學)에도 밝았으며, 영달에는 마음이 없었다고 한다.


정희성

(鄭希聖) 1599-1648, 자는 대진(大進), 호는 자노당(自老堂), 선무랑 문형(文亨)의 아들. 미수 허목(許穆)과 함께 정언옹(鄭彦)에게 글을 배우고 광해군때 재주와 학문을 숨기고 세상에 나가지 않았으나 학자로 명성을 떨쳤다.


정희언
(鄭希彦) 대장군 초(初)의 손자 조선 초기에 영동정(令同正)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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